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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2009년 상반기 교회학교 기존교사 교육 / 중고등부 담임 교육목사님


요 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교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마땅히 강조해야할 내용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결론은 21:15입니다. 사실 21장은 삽입장입니다. 20장에서 그 목적이 최종적으로 완성이 됩니다. 21장은 왜 필요할까? 이 말씀이 없다면 사도행전으로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행1장에는 베드로가 지도자로 연설, 2장에서는 설교로 3000명을 구원하는 역사가 나옵니다. 그러면 어떻게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가 어떻게 초대교회의 가장 위대한 사도요 종이 되었느냐 연결이 안되잖아요. 그것의 연결이 21장입니다. 어떻게 가장 큰 쓰임을 받는 제자가 되었느냐. 비결과 원동력이 무엇이냐. 그것이 21장입니다. 그것은 동일하게 죄안되었던 사람들이 어떻게 종이 되어서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느냐 설명하는 장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베드로는 바뀔 수 있었을까? 요소가 무엇이었을까? 가장 중요한 것. 소명의식, 은사도 아닙니다. 리더십도 아닙니다. 지식도 아니고 언변도 아닙니다. 벧전후가 가장 많은 문법적 오류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의 쓰임의 핵심은 베드로가 다른 사람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구에게 맡겨야 할까. 예수님은 많은 고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영광과 모든 은혜와 축복이 머무는 곳인데. 그 가장 귀한 것을 맡길 때 누구에게 맡겨야 할까. 생각을 하셨을 겁니다. 결론적으로 가자 사랑하는 사람에게 맡기기로 결정하셨고 가장 현명합니다. 신의 지혜죠. 누구에게 맡길 수 있을까.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주님이 사랑하는 것도 맡길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봉사의 섬김의 신앙생활의 모든 동기가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시작돼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세 번 반복은 가장 중요한 것을 나타내실 때 사용하는 문법적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복음, 특성에 대해서 반복하셨습니다. 동이란 반복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내용만이 세 번 반복해서 제시되고 있는겁니다. 결국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고전 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전 13: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고전 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기보면 사랑이 모든 것보다 우선된다는 것을 분명하고 간략하게 말씀하십니다. 능력보다 우선은 사랑. 지식과 능력보다 선행돼야 하는 것이 사랑이다. 심지어. 모든 것. 보다 사랑이다. 교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질은 우리는 소명의식을 이야기 합니다. 중요합니다. 인격적 자질도 중요합니다. 그보다 더 먼저 고려하고 갖춰져야 할 것이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사랑하면 주님이 공급하실 겁니다. 주님은 그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능력을 공급하셔서 그 일을 완수하게 하시느다는 겁니다. 능력보다 사랑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만 합니다. 지금도 마음을 보십니다. 그리고 마음에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가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은혜와 능력을 베추셔서 일을 하게 하는 겁니다.

 

1. 주님을 사랑하는 자를 찾으신다

사 66: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처음 시작할 때.

사 66: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성전, 제사장의 형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없었단 거죠. 마음이 없는 섬김은 안받으신다는 겁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은 어리석고 위험 천만했습니다.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딨겠느냐. 하나님이 쉴 수 있는 곳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사는 사람의 마음 속입니다. 그 속에서 진실된 평강을 누릴 수 있는 거예요. 당시는 마음은 멀었던 겁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600년이 지나서도 예수님이 동일한 말씀을 하셔씁니다.

마 15: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1000년 동안 우상숭배를 했다고 할 때 나머지는 짓는 죄는 외식입니다. ... 2500년이 지나도 마음까지 돌아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살아오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돌아오고 주님께 가는 때까지 시름해야 할 내용이 마음 속의 외식입니다. 겉으로는 주님을 섬기지만 마음으로는 세상을 섬기지 않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을 주는 사람을 찾는 겁니다. 당시 양을 받치는 110만명 중에서 진심으로 하나님께 마음이 돌아온 사람이 몇 명이었는가. 렘 시대에는 단 한명도 없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AD70년에 로마가 멸망시킬 때 예루살렘에 모여있는 동안에 포위됐습니다. 왜 하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려고 했던 그 절기에 포위가 되었을까.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내가 왔는데 하필 포위됐다. 결국 5개월 동안 그들이 당한 일은 나무뿌리, 허리 띠, 신발 삶아 먹고 자식을 먹다가 학살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마음이 없는 형식이라는 거죠. 그러한 것을 교훈하기 위해서 그러신 겁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마음이 있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렘 4:25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왜 이런 혼동이 닥쳤는가. 실제로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고 이 혼란에 의해서 사람이 없어지는 겁니다.

렘 5: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사람은 많은데 공의를 구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는 겁니다. 그러한 사람을 찾습니다. 그런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등장하면 하나님은 진노를 돌이키십니다.

겔 22:30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고로
겔 22:31 내가 내 분으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 사람을 찾다가 못찾았습니다. 이제는 그 한분이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막아 서셔서 그 위에만 쏟아졌습니다. 이제 누구에게 그 일을 맡길까 하는 겁니다. 어쩌면 우리 시대 때 우리 대한예수교 침례회가 그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잠시 시간을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진노가 쏟아지기 전에 우리가 마음을 오로지 해서 주님을 사랑하고 한 영혼이라도 건지는게 중요합니다. 사랑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2. 사랑은 봉사에 우선한다.

눅 17:7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 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눅 17:8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종은 자기라는 뿌리가 뽑힌 사람입니다. 그게 종의 자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 할 일이 7절과 8절입니다. 밖에서 일하는 것, 세상이라는 밭을 갈아서 복음이라는 씨앗을 뿌리는 것. 그리고 목자의 역할입니다. 목자로서 다친 양을 치료하고 좋은 곳으로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밖에서 하는 일이라면 안에서 하는 일이 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주님을 섬기는 일이 있습니다. 먹을 것을 예비하고 수종드는 일, 그것이 두 번 째 일이죠. 밖이 중요한가요. 안이 중요한가요. 7절은 주님의 일을 하는 거고 8절은 주님을 섬기는 겁니다. 주님의 일보다는 주님 자신입니다. 주님 자신을 섬기는 것은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 자신을 섬기는 사람은 밖에서 잘하게 돼 있습니다. 밖에서만 열심히 하면 한계가 드러나게 돼 있습니다. 적용시킨다면 교사들끼리 준비를 하고 주일날 학생들끼리 가르치고 하는 것은 주님의 일입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섬기는 시간입니다. 말씀 들을 때. 혼자 성경을 읽을 때. 기도로 교제하는 시간도 주님을 섬기는 시간입니다. 뭐가 더 중요합니까.

그런데 종종 이 두가지를 혼동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같이 있기는 하는데 그 시간이 끝나면 집에 가버리는 분이 있어요. 2부 때 안들어 버리는 분이 있습니다. 누가 지속적으로 오래할 수 있는가. 실제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볼 때 항상 말씀을 잘 듣고 개인 신앙생활이 잘 되는 분들이 오래 간다는 것을 봅니다. 광주에 특히 여러 분들이 계십니다. 다양한 학력과 직업에도 불문하고 역사가 나타나는 교사는 말씀 시간에 잘 듣고 개인 신앙생활이 되는 사람입니다. 나이가 심하게 많아서 기억력이 적을지라도 되는겁니다. 탁월한 지식도 주님은 그것으로 결과를 내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정말 열매가 나오는 것은 누가 주님을 사랑하는 겁니다. 잠깐 반짝였다가 사라지는 겁니다. 많은 사람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정말 봉사보다 주님을 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2부집회를 빠지시는 분들, 주일 말씀에 집중하지 않는 분들. 오래갈 수 없는 겁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계 2: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계 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계 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많은 장점들이 있습니다. 교리적 장점도 있습니다. 이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단지 사랑을 버렸다는 이유로 5절에 촛대를 옮기시겠다는 겁니다. 결국은 육신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그 예로 베드로를 들 수 있습니다. 목숨도 버릴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없었던게 있어요. 아직 주님이 죽어주시지 않았고 그 사랑이 심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 주를 위해 살았지만 결정적으로 실수를 합니다. 세 번이나... 세 번은 항상 강조라고 해씃ㅂ니다. 결정적일 때 육신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에베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있어도 안되는 겁니다.

부활후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진심으로 주님의 사랑이 부어졌기 때문에 이제는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로 십자가에 죽으 f때까지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 차이는 단 하나 주님의 사랑이 그 안에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봉사보다 의지, 인내, 게으르지 않음보다 중요합니다. 혹시 형식적이지 않은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3. 사랑은 능력에 우선한다.

당연히 은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은사를 주십니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가르치는 방법을 공급받습니다. 사랑은 우선합니다. 우리는 이순신 장군이 세계에서가장 훌륭한 장군이라고 합니다. 넬슨 제독보다 이순신 장군을 높이 칩니다. 어떻게 탁월했을까. 바로 나라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능력으로 승화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djEJgrp rm 여건에 맞는 그 작전을 구사할 수 있었겠어요. 반드시 물리쳐야 하는데.. 어떻게 물리칠 수 있을까 하는 그런 마음이 명랑해전, 한산대첩의 원동력이었습니다. 훈련 한번 받은 적이 없는 사람들이 군대를 물리친 적이 실제로 있습니다. 훈련 한번 안받았는데 그 능력이 어디서 왔습니다까? 그들은 나라를 빼앗기면 안된다는 죽기살기 마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떻게 1000배나 많은 아랍을 이길가요? 물론 하나님의 도우심과 그들의 아믕에 그 땅을 빼앗길 수 없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말에 여자는 강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실제로 그 말이 사실입니다. 공장에서 프레스 찍는 할머니들. 쓰러지지 않습니다. 젊은이는 힘들다고 하는겁니다. 그 사람들은 이걸 하지 않아도 다른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힘들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할머니들은 여기 아니면 받아주는데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식을 키워야돼요. 그 것이 육체의 힘을 앞섭니다. 근원은 사랑이죠. 사랑에서 나오는 능력입니다. 정말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이 능력을 공급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개인적 능력은 사울이 더 뛰어났습니다. 얼굴, 키, 가문, 겸손, 효심, 지도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으로 실패했습니다. 다윗은 양치기 목동에 천덕꾸러기 였잖아요. 그런데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시 89:20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 나의 거룩한 기름으로 부었도다

여기 ‘찾아’라고 돼 있습니다. 찾고 찾고 찾다가 찾아낸 겁니다. 찾아 낸 다음에는 기름을 부었습니다. 능력을 주신거죠. 그 다음부터는 그 능력으로 일한겁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교육적 마인드, 지식이 없다할 지라도 성경을 통해 공급하실 것을 믿고 실제로 지금까지의 역사로 드러났습니다.


4. 사랑은 지식에 우선한다

가르치는 교사라는 특성상 우리는 성경에 관한 많은 지식이 있어야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학교에는 성경을 위해 공부하는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그 지식에 사랑을 빠져버리면 그 지식이 마음에 상처를 주고 다치게 하는 지식이 될 수 있습니다.

고전 8: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전 8: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여기 지식으로 행동하는 것과 사랑으로 행동하는 것이 어떤 것이나으냐 하는 답이 나와 있습니다. 답은 사랑으로 행동하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과 공동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 지식대로 하다가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겁니다.

고전 8:13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다른 형제의 맘에 걸림이 되지 않도록 하겠다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지식을 내우고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가장 교만했어요. 우리도 그런 마음이 있어요. 다른 사람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려는 마음. 그래서 바울은 특별히 더 조심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예수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는... 이라는 말씀이 나온겁니다. 그래서 고린도는 변화하고 발전했습니다.

고전 8:9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우리 주변에는 약한 교사가 있습니다. 강한 교사는 보충을 생각해야지 업신여겨서는 안되겠습니다.

롬 14: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혹시 내가 하는 말이 형제, 자매에게 걸림이 된다면 주의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뭔가를 깨닳아도 절제할 줄 아는 미덕이 필요합니다. 바르지만 거리낄 수도 있습니다.

롬 15:1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롬 15: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

여기서 나온 것처럼 이웃을 기쁘게 하는 삶. 이것이 중요합니다. 사랑없는 지식은 교만케, 다른 사람을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5. 사랑은 죄와 유혹으로부터 나를 지켜준다.

본으로 가르치는 거죠. 우리가 가르치는 것은 개념이 아니라 본입니다. 교회 교육의 목적은 가르치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실제로 행하게 만드는 것 까지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라. ~ 때문에. 이것은 개념입니다. 살게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단점이 거기까지만 가르칠 수 있다는 겁니다. 행해지는 것은 계속이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개념 가르치는 것에서 끝나버립니다. 그래서 학부모 연계 교육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온전히 부모에게만 달렸겠습니까?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실천으로 본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그 본보기는 죄를 멀리하고 선을 가까이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랑에 기반합니다. 사실은 눈빛만 봐도 얼굴 표정만 봐도 아는 겁니다. 얼굴을 잠깐만 봐도 압니다. 피곤한가요? 어려운 일 있으신가요? 아는 겁니다. 단지 두시간이지만 그 시간에 나오는 행동, 표정에서 학생이 나의 생황을 전반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굉장히 조심해야 하고 그러한 위선적인 행동을 하지 않으려면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하는 겁니다.

요 14: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주님이 또 사랑해주십니다. 우리 안에 거하실 뿐 아니라 역사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정말로 주님을 사랑할 때 우리가 본이 되는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 교회학교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찬양반, 관현악반, etc.

개념을 가르치는 것에서 끝나버리면 삶에 연결이 안됩니다. 시간과 장소가 필요합니다. 학교에서는 가르침을 받고 군부대에서는 훈련을 받는 겁니다. 절도있는 삶을 가르치는 훈련소는 따로 있잖아요. 그런 특별 훈련소가 있기에 군인이 군인답게 되는 겁니다. 학교만 있다면 군인답지 못한 군인이 양산되겠죠. 우리도 가르치고 활동할 수 있는 장소가 없다면... 물론 부모님께 위탁했습니다. 그래도 교사들이 제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삶에 적용시키게 만들 수 있을까. 그런 것들을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고등부는 수련회, 유초등부에서는 감정적으로 좋은 영향을 미치는게 더 중요할 겁니다. 유치부는 지식을 전달하기에 좋은 환경은 아닙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정서적인 측면입니다. 밝고 평안한 환경. 지금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데 가르침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유치부는 특별히 정서적인 부분이 고려가 되겠죠. 머릿돌도 칼라와 도구. 초등부라면 지식적인 부분도 많이 고려가 돼야 합니다. 반드시 구원을 받게 하는게 교육목표가 됩니다. 바른 구원관. 그리고 5,6 학년이 되면 자기들의 의지와 힘으로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을 시작할 때 체화는 더 중요합니다. 더 많은 활동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중고등부에 갈수록 더 의지적인 실천이 강조 돼야겠죠. 유치부부터 다닌 학생들은 중2,3 되면 거의 압니다. 그러나 실천이 없어서 깨닫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모임이 필요한 겁니다. 어쩌면 그러한 것들이 학교나 집에서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단 주의 하실 것은 주님의 교훈과 병행하는 것이여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재미를 준다고 해서 흥미만 주려고 했다가는 정말 본질은 망각하고 형식에 급급해서 지쳐버립니다. 성경 읽기 모임 같은 것은 지속적으로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실제적인 성장에 도움을 주니까요.


6.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 자매를 사랑한다.

요1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의 특징이 나와 있습니다.

요1 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확실한 외적인 증거가 무엇이냐. 형제를 실제로 사랑하는 것에서 나타난다는 겁니다.

요1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1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교회 안에 계시고 교회는 형제, 자매로 구성 돼 있습니다. 형제, 자매 대하는 태도를 알 수 있고 주님을 대하는 태도를 알 수 있습니다. 보이는 형제, 자매에게 어떠한 태도를 취하는 가 하는 것은 나중에 심판에 굉장히 중요한 요인이 될 것입니다. 교회에 한 것은 주님께 한 것과 똑같이 받아들인다는 거예요. 내 옆의 형제, 자매를 어떻게 대합니까. 말투와 인사하는 것만 봐도 압니다. 거치는 말은 굉장히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교사는 굉장히 다른 계층입니다. 그것들이 형제, 자매란 이유로 무시돼서는 안되겠어요. 나이, 세상의 위치.가 다 무시가 되버리면 안됩니다. 마땅히 고려가 돼야 합니다. 나이가 많은 분께는 그에게 합당한 대우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학교에서 청소하는 것, 당연한 겁니다. 나이가 한 살이라도 많은 사람이 그런 일을 한다면 나이 어린 분이 더 하려고 해야죠. 이러한 것들은 정말 기본적인건데 그게 안돼있는거죠. 특별히 연장자에 대한 대접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할려고 해야겠죠. 특별히 주님께서 죄를 말씀하신 것이 형제를 업신여기고, 판단하고, 상처를 준 죄는 심판한다고 하신 큰 죄입니다. 부모님 입장에서 형, 동생이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애가 중요하죠. 기본적인 예절은 우리가 갖춰야겠습니다. 더 상위의 예절도 갖춰야겠습니다. 그런 것이 없다면 우리 가르침도 헛된 겁니다. 나이 드신분도 마찬가집니다. 적당히 많으신 분들이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이제 갖 들어온 형제, 자매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

몬 1: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빌레몬은 개인입니다.

몬 1:9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바울은 당시 60세정도 였습니다. 바울은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빌레몬은 바울 사도로 인해 구원을 받고 바울을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명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명령하거나 무례하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인 서신에 공식적인 인사가 있는 것입니다. 3절이 그것입니다. 그럴 필요는 없었죠. 공식적인 인사를 하고 4절부터 7절까지 격려하고 정말 조심스럽게 말을 시작합니다.

몬 1:8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조심스럽게 말하는 겁니다. 표현도 보십시오.

몬 1:9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몬 1: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다, 감옥에 갇혔다고 일부러 썼잖아요. 짠하잖아요. 나이 많으신 분이 그리스도의 일을 하다가 감옥에 갇혀서 나에게 간구한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빌레몬을 대하는 태도였습니다. 정말 조심스럽게 사랑으로 간구했습니다. 만약 명령을 내렸다면 순종할 뿐인 억지가 되는 겁니다. 억지가 아니라 자의가 될 수 있게 간구하는 겁니다. 아마 빌레몬은 이 편지를 받고 더 많은 일을 했을겁니다. 내가 스승인데, 아버진데.. 하는 것은 이방인에게나 잘못된 교회에게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서로 존중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요청했는데 듣지 않을 때는 교회의 명령이 필요하겠죠. 그것도 돌이키기 위한 것이지, 책망은 아닙니다. 명령이 질서는 아닙니다. 교회의 질서는 자발적인 질서입니다. 벤허의 종은 자발적인 종이잖아요. 우리는 의지를 갖고 종이 된 사람입니다. 인사도, 행하는 것도 존중하는 예를 갖춰 해야합니다.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정말 마음이 넓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하는데요. 작은 것에 마음이 쓰입니다. 솔로몬처럼 넓은 마음을 가진다면 더 넗게 다스릴 수 있을텐데.. 정말 사랑 안에서 간구할 것이 주님 내 마음을 넓혀주십시오. 하는 마음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고후 6:11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고후 6:12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고후 6:13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를 위해서 입 뿐 아니라 마음도 넓혔습니다. 사실 전도비도 안줬기 때문에 낮에 일하면서 전도했습니다. 바울은 다 받아줬다는 거죠. 그런데 고린도 성도는 사사건건 시비를 가렸습니다. 그러면 문제가 누구에게 있느냐.. 성도들은 바울에게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 겁니다. 문제는 고린도 교회의 좁은 마음에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마음을 워낙 넓혀버리니까 문제가 안되는 겁니다. 잘못마져도감사 안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많은 사람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다스릴려면 얼마나 많은 문제가 생기겠습니까. 모세는 장정만 60만이었습니다. 잘 따라줘서가 아니고 모세가 온유했기 때문에 문제가 안됐던 겁니다. 문제가 안되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안됩니다. 미갈은 다윗이 옷벗고 춤추니까 비난했습니다. 결과가 뭡니까. 평생 다윗이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교사는 더더욱 마음이 넓어져야만 그러한 모든 것들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중2정도 되면 직격탄을 날립니다. 마음이 넓지 않으면 쥐어박고 싶은 아음이 듭니다. 그런데 더 생각해보면... 우리가 받아줘야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간구해야 할 것이 내가 바다처럼 넓은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는게 좋겠다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세상것을 교회로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말자.

요즘 세상은 무척 말초적인데 가끔 교회학교로도 들어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속적인 내용들을 도입해서 진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결론은 기독교적인데 내용은 기족교적인 것 반 + 형식은 세상적인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예방이 치료보다 낳다고 합니다. 애초에 잘못된 길을 따라가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적절한 타협은 없습니다. 전달하고자 하는 것과 전달 되는 것에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조금 가미가 되지만 나중에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영상이 남지 내용이 남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보수적인 방법으로 가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정말 마음을 열어놓고 기교제하고 기도한다면 정말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데서 오는 기쁨이 있잖아요. 그래서 여러 가지 이벤트와 자료로 본질이 왜곡되지 않아야 겠습니다. 애초에 맛보기를 안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너무 세속적인 것들을 우리 교회에서 허락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전도인들이 지적을 받는 부분은 예화도 명언도 성경에 나온 것을 들라는 것입니다. 가급적이면. 그렇습니다. 성경과 그 어느것도 동격이 되지 않도록. 적절한 자료. 걸릴 것 같은 자료는 안보여주는 것. 실제가 이렇다라고 보여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애초에 막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두발이나 복장도 단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도 영화나 드라마 이야기를 안하고 있습니다 .^^ 교회를 깨끗하게 지켜야겠습니다.

핵심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시고 이루신다.

아울러 봉사에도 열심, 지식에 충만함, 죄에 먼..그렇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초등부 한 선생님께서 정리하신 자료임.  설교를 들으면서 이렇게 바로 정리를 할 수 있다는것
참 대단하다라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