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실수
위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슬프게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만 실수하여 첩을 얻게 되었다. 그가 그렇게까지 된 경로는 다음과 같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15:5) 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었다. 그때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셨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 앞에 의로 여기심을 받을 만큼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 시혐에 그만 실패했다. 즉 그 시험이란 이렇다. 세월은 흘러 그가 가나안에 들어와 약속을 받은지도 어언 10년이 지났건만 아들이 없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가져 첩으로 준 때는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거한지 10년 후이었더라"(창16:3)
10년을 더 참지 못하여 아브라함은 아들을 얻기 위하여 첩을 얻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그 아내 사람의 권면을 따른 때문이었다. 창16:2에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치 아니 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 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하셨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말을 따라 하갈을 첩으로 얻었다. 이것이야말로 아브라함의 큰 실수가 아닐 수 없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아브라함은 지난 날에도 벌써 여러 차례의 작지 않은 시험들을 당했었다. 어떤 시험에도 잘 이겼으나 어떤 경우에는 넘어지기도 했다. 먼저 그가 이겨온 시험들을 보라.
1.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창12:1)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그는 순종했었다. 그것은 그는 그것을 순종하므로 잘 이겼다. 이로써 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2. 롯에게 슬픔을 당하는 시험이 있었다.(창13:1-11). 그때에도 그는 모든 권리를 그에게 모두 양보했었다.(창13:8-9).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길뻐하셨다. 그에게 가나안의 기업을 주시며 후손의 창성을 약속했었다.(창13:14-17).
3. 신앙의 용기가 있느냐 하는 시럼도 당했었다. 그는 318명의 적은 무리를 가지고 시날 왕의 연합군을 물리쳤다.(창14:1-16). 하나님의 의지하므로 오는 믿음의 힘이었던 줄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방패가 되어 주셨던 것이다(15:1).
4. 세상의 부귀와 영화의 시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겼다. 즉 소돔 왕이 제공하는 큰 재산을 그는 거절했었다(창14:21-23). 그때 하나님께서도 그를 얼마나 기뻐하셨던가. 친히 여호와께서 그의 상급이라 하셨다(창15:1).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그의 후손이 창성할 것이다. 물론 먼후일의 일이지만 그는 사랑하는 독자를 바치라는 그 어려운 시함에도 이겼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넘어졌던 시험은 어떤 것이었던가.
먼저 일상 생활에 있어서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하는 시험에 졌다. 즉 가나안에 흉년이 들었을 때 그는 약속의 땅을 계속 지켰어야 했지만 그는 가나안을 버리고 애굽으로 갔었다.(창12:10).
그는 아무리 궁핍하여도 모든 부족한 것을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이겼어야 했건만 그렇지 못했다. 사실 우리가 일상생활에 있어서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아브라함에게는 물론 순종도 있었도, 믿음의 용기도 있었다. 겸손한 양보도 있었고 물질의 욕심도 이길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굶주림을 이기며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모든 염려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언약만을 바라보며 살아 나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모든 드디어 시험에 못 견디어 애굽으로 내려 갔었다. 애굽에서 그는 큰 위경에 이른 때가 있었으나(창12:14-15) 하나님의 특 별한 권고로 그는 거기에서 무사히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창12:17-20).
다음은 오늘 본문에서 보는 시험이다."하나님께서 네 씨(자손)로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리라"는 약속을 받았다면 그는 그것을 믿고 하나님의 때가 이르기까지 견대고 참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10년 이상을 더 참을 수 없었다. 드디어 하나님의 거룩한 그 약속을 인간의 추악한 방법으로 이루려 했다.
마침내 하갈을 첩으로 얻어 아들을 보려했던 것이다. 하기는 아브라함도 사라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약속을 전혀 믿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전혀 믿되 그 약속을 믿되 그 약속을 하나님의 방법대로가 아니라 인간의 악한 수단으로 이루려 하였다는 거기에 그들의 실패가 있었다고 본다.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은 하나님의 거룩한 방법으로만 이루어져야 한다. 인간적 인 방법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을 이룰 수눈 없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방법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오기까지 참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가 그렇지 못한데 그의 실패가 있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자주 느끼는 것은 약속을 바라보며 오래 참고 견딘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야곱의 경우에서도 그것을 본다.
창25:23에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자를 섬기리라"는 약속을 받고 태어난 아들이 곧 야곱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때를 허락하 시기 까지 그는 믿음으로 오래 참고 견디었어야 했었다. 그러나 그는 참지 못했다. 인간의 속임수로 장자의 기업을 빼앗으므로 그 언약을 이루려 했다. 그는 그것 때문에 일생을 유리하며 고생하며 고생해야 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의 잘못된 방법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신 약속을 받기 위해서는 많은 인내가 필여하다.
히브리서 10:26에도 보면 "너희에게 인내가 필여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하심을 본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기 위해서는 반도시 오래 참았어야 했을 것인데 그만 10년에 지치고 말았다. 그가 첩을 얻은 결과도 물론 비참했다. 우선 가정에 불화가 생겼다.하갈은 사라를 멸시했다 (창16:4). 사라는 또 하갈을 학대하여 내어쫓아야 했다(창16:6). 그 여종 하갈의 후손과 사라의 후손 사이에는 늘 전쟁이 있어 천추의 원수가 되어버렸다.
아브라함이 첩을 얻은 그 결과는 참으로 비극, 그것이었다. 어떤 사람들 중에는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다처주의를 용납하시지 않았 던가 의심하는 자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성경은 신구약을 막론하고 철저한 일부 일처 주의이다. 말라기2:15에 보면 "여호와는 영이 유여 할찌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였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찌니라" 하셨다. 이것은 일부 일처이어야 한다는 뜻만 아니다.
오직 그래야만 경건한 자녀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던 아브라함의 씨 중에는 드디어 불경건한 씬가 섞기게 되어 두고 두고 큰 불행의 근원이 되었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역사에 있어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거듭 말하거니와 아브라함이 첩을 얻은 것은 결코 하나님의 허용이거나 묵인이 아니었다. 분명히 그것은 그의 큰 실수 였다. 그러면 믿음의 조상인 그가 어떻게 그런 실수를 범하였겠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그가 아직도 옛 습관과 옛 풍속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때문이었가고 본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말려 들어간 옛 습관이란 어떤 것인가. 아브라함 시대의 것으로 소위 하므라비 경전(Hamurabi Code)이란 것이 일찌기 발굴 되었는데 거기에 보면 바벨론에 있어서는 아내 된 자가 자녀를 낳지 못하는 경우 여종을 남편에게 주어 자녀를 얻어 자기의 자녀로 삼을 수 있다는 법이 허락 되어 있다. 하무라비의 경전 밖에도 그러한 법률의 흔적이 다른 고고학적 자료에도 나타나 있다. 그것은 모드 아브라함 시대의 그의 고향이었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서 발굴된 자료들이다. 사라와 아브라함이 하갈을 그의 첩으로 얻게한 것은 그러한 시대의 풍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세속적 불신행동이었음이 확실하다.
우리는 이제 엄숙히 사도 바울의 다음 성구를 다시 한번 묵상하자, "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4:22-24).
아브라함의 시련
위의 본문들은 창세기 16장의 끝절과 17장 첫절이다. 16장은 아브라함이 하갈을 첩으로 얻어 이스마엘을 낳게 된 기록이다. 그 때의 아브라함의 연령은 86 세였다고 그 끝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뒤이어 곧 따라 나오는 창세기 17장 첫절을 보면 아브라함의 99세 때의 일이 기록되어 있다. 아브라함이 99세 때이란 곧 그 아내 사라가 이삭을 잉태하는 해이다.
그러고 보면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본 후 다시금 이삭을 낳기까지 13년이란 긴 세월이 공백으로 뛰어 넘었음을 본다. 이스마엘을 낳은 후 13년 동안의 아브라함의 역사는 알 길이 없다. 진실로 침묵의 13년이다.이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는 아브라함과의 교통을 끊었던 때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거두셨던 기간 이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A.W.Pink). 비록 그것은 분명치 않다. 할찌라도 한가지 분명한 것은 성경은 그 13년간의 긴 세월에 대해서 침묵을 지켰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침묵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까?
흔히 히브리 사람들은 13의 수를 고난과 시련의 수라고 생각했다. 에스더 3:1213에 보면 하만이 유다 민족을 전멸하기로 결정하고 왕이 조서를 내린 날이 [정월 13일]이었고, 그것을 집행하기로 결정한 날도 "십이월 곧 아달월 13일" 이었다(이밖에도 창14:4, 창47:9등도 참고). 히브리 사람들은 그러한 일들을 생각하고 13의 수를 고난의 수 또는 시련과 반역의 수로 생각하는 풍속이 생긴줄 안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하나님의 친구라고 까지 불리우던 아브라함이 하 나님과의 교통이 끊긴 13년 긴 세월이야 말로 그 얼마나 괴로운 시간들었으랴! 그 기간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큰 시련의 기간이요, 깊은 반성의 기간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13년의 시련 중에도 오히려 아브라함의 믿음은 크게 자랐음을 본다.
로마서 4:19에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했음을 본다.
그가 85세가 되던 해에 사라의 태를 믿지 못해서 첩을 얻어야 했건만 오히려 백세가 다 되어 그 믿음이 견고해졌다면 그 무엇 때문이었을까? 환난과 징계가 때로는 성도들에게 유익하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때에 오히려 믿음이 자라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끊긴 괴로운 13년, 그러한 때에 오히려 참고 기다리며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않았다.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그와 13년이나 교통을 끊었었을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13의 수가 무슨 고난의 수가 되어서 그 수를 채우기 위하여 그런 것은 아닌 줄 안다. 그러면 무엇일까. 그 대답으로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는 아브라함이 99세가 되는 것을 기다림이요, 둘째는 이스마엘이 13세가 되기를 또한 기다리기 때문이었다. 그 증거로 "창17:2425에 "아브라함이 그 양피를 벤 때는 99세이었고 그 아들 이스마엘이 양피를 벤 때는 13세이었더라"고 하심을 보아서 그렇다. 여기에서 보는대로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99세였고 이스마엘은 13세 나던 해였던 것이다. 먼저 하나님께서 그의 어린 아들 이스마엘이 13세 되기를 기다리셨다는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그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위함이었다고 본다. 옛날부터 이스라엘의 풍속에 남아가 나서 13세가 되면 성년의 예식을 행하는 법이 있었다. 그것을 (바르.미즈바)라고 부른다.그것은 남자로서 13세가 되면 비록 부모를 떠나 어디를 가나 살 수 있다는 뜻으로 그런 예식을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이제 13세가 되었다. 위에서 말한 소위 침묵의 13년이란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13세까지 키우는 시간이었다. 이스마엘은 비록 언약 밖에 있는 죄악 된 혈육의 씨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쌍히 여기셨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년의 해가 되기까지는 이스마엘로 하여금 고이 아브라함 의 품에서 자라게 했다.
흔히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창21:12)고 명령하심은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닌가 하다. 그러나 그 렇치 않다. 물론 그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도 심히 그 아들 (이스마엘)을 위하여 그 일이 (내어 쫓는 일)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라고 하였음을 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내어 보내는 이스마엘에게 얼마나 크신 은총을 베푸셨던가를 우리를 알아야 한다.창17:20에 "...내가 그에게(이스마 엘) 복을 주어 생육이 중다하여 그로 크게 번성케 할찌라. 그가 열 두 방백을 낳은리니 내가 그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하셨다.
물론 그 약속은 그의 당대에 다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본다(창25:12-18). 또 쫓겨 난 하갈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긍휼을 베푸셨던가. 그가 처음 쫓겨 났을 때는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방성대곡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로하셨고(창21:18), 그의 눈을 밝혀 샘물을 보게 하셨다.(창 21:19).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은 참으로 크고 놀랍다고 해야 할 것이다.
창 21:19에도 보면 "하나님이 그 아이와 (이스마엘)함께 계시며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 거하며 홀 쏘는 자가 되었더니" 하신 말씀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을 내어 쫓으라고 하셨다고 하여 결코 그를 버린 것이 아니었다. 물론 하갈을 같이 내어 쫓은 것도 이스마엘을 키우기 위하여는 부득이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일반 은총은 그 어느 사람에게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음을 알아야한다. 하나님은 그 어떠한 사람에게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 어떠한 사람에게도 가혹하게 학대하신 일은 없다. 사실은 그와 반대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배반하거나 받아 들이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멸망의 길을 택하는 것뿐이다. 언약 밖의 아들인 이스마엘까지도 성년(13세)이 되기 까지 고이 아브라함의 품에거 자라게 했고 그가 광야에 내어 쫓긴 후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이 하시며 그에게 창성하는 한량 없는 복을 주셨던 것이 아닌가.
또 다음 둘째로, 소위 침묵의 13년은 아브라함이 99세 되는 것을 기다리기 위함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로마서 4:19-21에 "그가 100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 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했음을 본다. 99세는 100세를 바라보는 해이다.연령이 100세이면 위의 셩경 말씀과 같이 바라보는 해이다. 연령이 100세이면 위의 셩경 말씀과 같이 "죽은 것 같음"이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태가 완전히 말라 "죽은 것 같이"
되었음을 누구나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그때까지를 기다리게 했었다. 아브라함과 사라로 하여금 인간의 무능함을 철저히 깨닫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믿음이 확실해지기까지를 기다려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려 하였던 것이다. 물론 아브라함은 100세가 되기까지 특별히 그 마지막 이스마엘을 키우던 그 13년간은 많은 회개가 있었을 것으로 안다.
특별히 불신앙의 씨요,죄악의 씨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이스마엘을 키우면서 그가 자라는 것을 지켜 보았을 때의 아브라함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었을까.
우리는 희미하게나마 그것을 상상할 수도 있겠다. 죄 없는 어린아이를 놓고 불쌍히 생각하는 마음과 스스로 회개하는 마음을 그는 금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회개는 마침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깊은 신앙으로 점점 자랐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침묵의 13년은 결코 헛된 공백이 아니었고 시련의 그 13년은 그의 믿음이 더욱 깊어지는 회개의 기간이었을 것이 거의 분명하다. 죄악의 씨를 슬픈 마음으로 묵묵히 키우던 그 13년은 오히려 새로운 언약에 대한 신앙을 키우는 복스러운 기간이기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함은 지나친 상상은 아닐것이다.
아브라함과 사라
위의 본문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도 늘고 사라도 늙었다. 사라는 완전히 단산하였다. 성경은 그를 가리켜 [죽은 자와 방불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잉태하는 힘이 어디서 왔을까. 히브리의 기자는 믿음으로 잉태하는 힘을 얻었다고 했다. 그렀다면 그는 얼마나 큰 믿음을 가졌기에 그러한 이적이 생길수 있었을까? 사실 성경에서 보는 대로 그는 그렇게 큰 믿음을 가졌던 여성이라고 생각키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우선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여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첩을 얻게 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더구나 창세기 18:10에 보면 두 사람(사실은 천사들)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했을 때 그는 장막 뒤에서 숨어서 하는 말이 "내가 노쇠 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창18:12) 하며 속으로 웃었던 사람이다.
이 웃음은 불신앙의 웃음이요, 비웃음의 웃음 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그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창18:13) 하며 꾸짖었음을 본다. 그는 거듭 "여호와께서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하며 그의 불신앙을 책망 하였다. 그 때에 사라는 그만 두려워서 그 일을 승인치 아니하며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15절)했다.
그러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15절). 이것은 천사의 말이었다. 이러한 천사와 사라의 대화에서 그의 불신앙은 여실히 증명되었다고 본다. 즉 그는 자기가 "믿음으로 사라 자신은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히11:11) 했음은 어찌된 일일까.
이렇듯 모순된 듯 보이는 거기에 사실은 깊은 진리가 숨어 있다. 사라의 마음속에는 분명히 신앙과 불신앙이 함께 있어 서로 갈등이 있고 투쟁이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믿는 마음과 믿지 못하는 마음이 서로 싸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비웃기도 하고 두려워 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침내 그의 신앙은 승리한 것이다. 그러므로 드디어 히브리의 기자는 그의 신앙만을 찬양하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아브라함의 역사를 보아도 같다. 구약에 나타난 아브라함에게는 실수도 많았고 허물도 많았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그의 허물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믿음의 조상으로 그의 믿음만이 케게 부각되어 있음을 본다.
롯의 경우도 같다. 그는 허물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아브라함을 슬프게한 사람이요, 소돔과 고모라를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술에 취하여 불의의 두 아들을 낳았단 사람이다.(창19:32-35). 모압과 암몬이 비로 그런 아들들이 아니었던가 (창19:3738). 그러나 신약성경은 롯의 불미스러운 것을 기록하지 않았고 오히려 의로운 사람이라 일컬었음을 본다. 베드로후서 2:67에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았으며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고 하셨는데 롯은 과연 그처럼 의로왔던가. 아니다.
구약의 기록은 반드시 그렇지 않았다. 롯은 분명히 잘못이 많았었으나 신약은 그를 가리켜 의인이라 칭했다.
기생 라합의 경우도 같다. 그는 분명히 거짓말로써 정탐군들을 피난시킨 사람 이었다.(수2:45) 그 동기는 좋다 하겠으나 그 방법은 반드시 좋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그의 거짓을 말하지 않았고 그의 신앙만을 높이 찬양했다. 즉 히브리 11:31에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 하였도다" 했다. 이 어찌된 일들일까. 나는 종종 구약과 신약의 이러한 차이를 놓고 생각해 본다. 즉 신약은 구약의 심판대라고--
이제 신약이 구약의 아브라함을 심판한다고 가상해 보자. [아브라함아, 너는 믿음의 큰 본을 보인 조상이었다.] 이런 판단을 받았었다면 아브라함은 무엇이라고 대답 했었을까.[아니요, 저는 하나님의 약속이 믿어지지 않아 첩을 얻은 일도 있었읍니다.] 이렇게 그가 그의 양십대로 대답했다면 그 때 신약성경은 또 무엇이라고 말했었을까. [아니야, 너는 믿음의 조상이야!] 이렇게 판결했었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롯의 경우도 같고 사라의 경우도 일반일 것이다.
비록 겨자씨 같이 작은 믿음일찌라도 그것은 태산 같은 허물을 용서받게 하고 드디어 의롭다 함을 얻게 하는 신비로운 힘을 갖고 있다.
장차 우리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에도 그것은 같을 것이다."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았느니라" (마태 25:34-36). 우리가 장차 이러한 판결을 받았다면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의롭지 못함과 적은 믿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크게 칭찬하시어 의인의 반열에 서게하실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하나님의 막중한 은혜라고 할 수 밖에 없겠다.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 사라의 믿음도 그렇다. 그것은 많은 의심의 큰 보자기에 싸인 작은 겨자씨 한 알 같은 것이었지만 마침내 그는 그것 때문에 큰 믿음의 어머니가 되었고, 죽은 것 같은 그의 태에서 이삭을 잉태하는 기적이 생겼던 것이다.
믿음의 위대한 능력이여! 아들이 없어 탄식하던 그에게 이제는 큰 기쁨이 왔다. 이삭을 낳았을 때 그는 기쁨을 억제하지 못하고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참으로 감사의 웃음이요, 기쁨에 넘치는 감격의 웃음이었다. 창21:56에 "사라 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그는 이렇게 기뻐했다. 신앙의 승리의 기쁨이었다. 처음 불신앙의 비웃음을 웃었던 그가 마침내 감격적인 신앙의 웃음을 웃게 되었으므로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다. 히브리 말의 이삭은 [웃음]이란 뜻이다. 이삭을 낳은 후 사라는 너무 기뻐서 하는 말이 "사라가 자식들을 젖 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 마는 아브라함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창21:7) 했다. 여기에 하나 이상한 것은 사라가 [자식들]에게 젖 먹이겠다는 말이다.
사라는 오직 한 아들 뿐이었는데 어찌하여 자식들이라 했을까. 여기에서 우리는 그 지방의 풍속을 잠깐 생각하여 봄이 좋겠다.
옛날 가나안 지방의 풍속에 자녀를 생산치 못하던 여인이 어떻게 아들을 낳게 되면 크게 잔채를 베풀고 이웃 동내의 여러 젊은 어머니들과 아이들을 불러 같이 즐기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순서 중의 하나가 아기들에게 젖 먹이는 것이라고 한다. 그 때 그 새어머니가 동내 어린이들에게 한 번씩 돌아가 며 젖을 빨게 함으로써 참으로 아기를 낳은 어머니란 것을 증명해 보인다고 한다. 생각컨대 자식들에게 젖을 빨리울 때마다 동리 어머니들은 박수를 치고 같 이 기뻐하며 웃음의 꽃이 피어 퍼졌을 것이다.
그러기에 창세기 21:6에 "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하는 기록이 남게 되었을 것이다.
이삭은 진실로 사라의 웃음의 아들이었다. 잉태할 때에 웃었고 출생 후에 웃었고 모든 여인들이 같이 모여 웃었고....
" 너희에게 겨자시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다면 이 뽕나무 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17:6).
" 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 이 없으리라(마17:20).
김희보(총신대 신대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