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한 가지다.
진보는 '당위'를 추구하고 보수는 '존재'를 추종한다.
진보는 아직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싸운다.
예컨대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같은 것이다.
그래서 진보는 약간의 자유를 속박하고 불평등을 조장하는 제도와 문화를 변혁하려고 한다.
진보의 사고방식은 연역적 구조를 가진다. '인간은 평등하다'와 같은 추상적 공리에서 시작해
구체적 실천 전략과 전술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계로 이어지는 일관성 있고 복잡한 논리 체계를 만든다.
어느 한 곳에서라도 의견이 갈라지면 누가 옳은지를 두고 논쟁한다. 그들 사이의 내전은 때로 보수와의 싸움보다
더 치열하고 처절하다.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시절 독일공산당은 사회민주당 정부를 공격하는 데 전력투구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을 향해 개량주의자, 베른슈타인주의자, 수정주의자, 이념의 배신자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히틀러와 나치스는 진보파의 분열을 이용해 손쉽게 권력을 장악했다. 스페인 내전 당시 바르셀로나는
마지막까지 프랑코에 대항했다. 그러나 공화주의 진영은 내부에서 벌어진 격렬한 이념 논쟁과 무력 충돌 끝에
자멸했고 프랑코 군대는 바르셀로나에 사실상 무혈 입성하는 행운을 누렸다.
진보의 경쟁력은 이상을 향한 열정과 논리의 힘이며, 망할 때는 거의 언제나 '연합하는 능력'의 부족 때문에
망한다.
보수는 이미 존재하는 현실을 불가피한 자연적 질서로 간주하고 그것을 지키려 한다. 어떤 질서든 상관없다.
전제군주제, 개발독재, 천황제, 심지어는 공산당 일당독재조차도 부수가 지키려는 대상이 될 수 있다.
보수는 진보와 달리 경험주의적, 실증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철학과 견해의 차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익이 일치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단결한다.
보수의 경쟁력은 가장 강력한 권력을 중심으로 단일한 위계질서를 수립하는 줄서기 문화와 냉철한 이해타산
능력이다. 그래서 보수가 망할 때는 걷잡을 수 없는 부패로 망한다. 이런 특징 때문에 보수의 힘은 일반적으로
진보를 능가한다. 보수의 무능과 부패와 나태함이 민중의 참을 수 없는 분노와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때에만 진보
가 승리를 거두며, 그 진보의 승리는 보통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후불제 민주주의 冊 . pp68-69)